깜빡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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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현대인의 문학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6. 8. 02:06
총평 21세기에 딱 맞는 급전개 그러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조소를 부르지 않는 이야기. 안톤 체호프, , 민음사, 2005 ※ 여담이지만 어린 시절 받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무려 10년이 넘게 방치해두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없었고(핑계네요), 그보다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에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전역 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한 권씩 한 권씩 읽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블로그 운영을 포함하여 해야할 일들이 많아 뜸해졌지만, 그래도 거의 45권 가까이 읽었습니다. 아주 먼 미래에라도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고 즐길 수 있는 삶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네요. 빛바랜 책장을 쓰다듬으며 책을 고르고, 리클라이너에 누워 책을 읽는 삶이 고픕니다. 「체호프 단편선」은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를 알게 해 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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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다시 쓴 로빈슨 크루소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5. 31. 22:05
로빈슨 크루소 뒤집어 버리기~!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2005.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작품이다. 방드르디(vendredi)는 프랑스어로 '금요일'이라는 뜻이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금요일' 하면 '프라이데이', 즉 로빈슨의 노예로 있던 원주민이다. 그러니 미셸 투르니에가 제목에 '방드르디'를 넣었다는 것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노예였지만, 친구가 된다. 「로빈슨 크루소」를 어린 시절 읽었을 때, 그는 강인했고 멋있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삶을 일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 매우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아름다운 문명의 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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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모래, 모래, 모래!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5. 10. 22:28
머리 위로 모래가 쏟아져 내리는 기분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민음사, 2005 작품은 시종일관 모래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야 「모래의 여자」라는 제목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제목에 입각하여 살펴보면 여자의 이미지도 시종일관 등장해야 하며, 그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그다지 논하고 싶지 않다. 읽는 내내 꺼끌한 맛이 입 안에 남아 있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모래가 흘러가는 이미지가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계속 흘러서 닦아 내도 없어지지 않고 심지어 보충된다. 모래산의 거대한 흐름을 삽으로 막는다는 건, 마치 재래식 미사일 한 방으로 지구에 떨어지는 직경 10km짜리 운석을 걷어내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실은 그런 거대한 흐름에 타협하여 달아나지 않는 것부터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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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이태준「달밤」, 성석제「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깜빡의 서재/함께 읽기 2021. 4. 25. 00:50
개인적으로 이태준의 「달밤」, 그리고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두 작품을 읽으며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돌이켜 보면서 두 작품의 사건이나 인물이 뒤섞여 좀 고생했다. 주제별로 엮어본 책들, 첫 글로는 '바보'가 등장하는 작품인 이태준의 「달밤」, 그리고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소개해본다. 공통점 앞서 간단히 밝혔던 것처럼 두 작품은 닮은 점이 상당히 많다. 1. 우선 두 작품 모두 '바보'라고 불리는 인물이 등장하며, 둘 다 '황'씨이다(굳이 순서대로 본다면 이 '황'씨의 기원은 1933년에 탄생한 황수건이겠지만, 굳이 따지지는 말기로 하자. 또한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다. 이 점을 꼭 유의하자). 개인적으로, 독자가 두 작품을 헷갈려하는 가장 큰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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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작가 30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4. 21. 01:01
# 국어교육 전공자의 시각에서 든 생각을 담아 보았습니다. 총평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한국어. 그 한국어가 외부의 것이 되는 세계. 문지혁, , 민음사, 2020. 필자는 국어교육 전공이다. 한국어는 국어교육 전공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또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사랑스러운 언어다. 애증의 관계이긴 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국어가 망망대해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가에 내놓은 장독대 같은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그동안 문학교육 관련 전공이나 21세기 한국소설의 이해같은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허구성이 소설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100점을 주어도 모자랄 만큼 허구성을 잘 활용하고 있다. 소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읽었다면, 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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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4. 19. 22:23
이상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의 눈에 찬다. 이상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적은 글을 발견하고, 어떻게 자신이 이상한지 적은 글을 남긴다. 그런 글이다. 에 등장하는 하리 할러, 그러니까 는 그의 이명(異名)에 걸맞게 '내향성과 고독, 야생성, 불안, 향수, 고향 상실'을 지닌 존재다. 그는 묘한 '마력'의 소유자이며, '고통'을 항상 몸에 담고 있다. 그렇지만 하리 할러는 겉보기엔 음울해 보이는, 종잡을 수 없는 사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이 사내는 친절하게 를 남긴다. 이 수기에 쓰인 내용은 하리 할러의 삶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 짧은 순간이 하리를 확 바꾸게 된다. 하리는 '스스로 자신을' 라고 주장했다. '공허의 흑염룡'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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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명랑한 밤길」속 음악깜빡의 서재/책과 음악 2021. 4. 18. 11:11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으면 뭔가 와 닿는 느낌을 받고, 다시 찾아서 듣게 된다. 음악은 인간의 희노애락, 인생, 그리고 경험을 모두 담은 것이다. 그렇기에 음악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혹은 속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명랑한 밤길」에 나오는 음악들은 동시대를 살아온 독자들에게는 친숙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음악 체험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간접 경험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음악과 텍스트를 함께 보면서, 인물들이 어떤 감정으로 소설 속 말과 행동을 하는지 한번 상상해 보면 좋겠다. 우선 첫 페이지 짤막한 가사들로 나왔던 곡들을 소개해 본다. 네 곡 모두 감성적인 발라드인 건 비 내리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 조용필,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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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4. 17. 23:45
세 번째 읽는데, 지난 두 번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그 전에는 '기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다지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는데,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여운에 남았다. 총평 세상을 관조하는 이미 포기해버린 듯한, 그런 기린. 사진 출처: unsplash Jessica Bateman 작품에서 아버지는 이미 삶의 의지를 상실했거나, 혹은 속세를 벗어나 버렸다고 느껴진다. IMF 당시를 말 그대로 풍문으로만 들은 세대로서, 납치당하는 사람들의 일상성은 필자에게는 말 그대로 쇼킹한 무언가였다. 사람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한 시절을 견뎌온,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아무튼 기린은 그 풍파를 결국 인류의 모습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존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