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다시 쓴 로빈슨 크루소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5. 31. 22:05728x90반응형
로빈슨 크루소
뒤집어 버리기~!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2005.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작품이다. 방드르디(vendredi)는 프랑스어로 '금요일'이라는 뜻이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금요일' 하면 '프라이데이', 즉 로빈슨의 노예로 있던 원주민이다. 그러니 미셸 투르니에가 제목에 '방드르디'를 넣었다는 것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노예였지만, 친구가 된다.
「로빈슨 크루소」를 어린 시절 읽었을 때, 그는 강인했고 멋있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삶을 일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 매우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아름다운 문명의 품으로 돌아가는 로빈슨을 보며 해피엔딩이라고 느꼈다.
이상하게도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등장하는 로빈슨은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삶을 개척하는 모습보다는,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주요하다. 무인도에서 나체가 되어 버린 로빈슨 크루소는 자연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대자연에 두들겨 맞게(?) 된다. 지속적인 두려움과 한계 상황으로 인해 로빈슨은 강인하고 굳센 이미지와는 멀어져 버리게 된다.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그러니까 생존에 내몰린 인간이 심지어 고독에 처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다. 그렇다. 우리가 만일 하루하루 살아남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게 된다면, 우리의 옆에 단 한 명의 사람도 없다면, 우리는 점점 말을 잃게 될 것이다. 내뱉는 말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속말도 잃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어그러져 버린' 언어의 성벽을 다시 메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로빈슨이 택할 수 있는 역할은 고고한 문명의 건설자가 아니다. 그는 그저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고, 그나마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일 뿐이다. 물론 로빈슨이 멋진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최선을 장담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문명 상태를 이룩했다는 데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로빈슨은 그런 멋진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하나 더. 로빈슨 크루소를 보며 '와, 깬다'고 느낀 가장 대표적인 지점이 있는데, 바로 만드라고라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만드라고라는 로빈슨의 '땅의 지배'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성욕'의 결과물이다. 이 결과는 분명, 로빈슨이 외로움으로 인해 괴상해진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제일 웃긴 지점은 그 다음에 등장하는데, 본인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방드르디를 보고 벌을 내리는 그의 감상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말 그대로 '내로남불'이며, 그의 과오를 본인의 입으로 내뱉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물론 로빈슨은 이 작품에서도 별장과 염소 우리, 그리고 저장고 등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도망치던 방드르디를 구해주고 그를 노예로 삼기도 한다. 문명 상태가 지속되었다면 로빈슨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결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리라. 하지만 '폭발'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된다.
문명의 기반을 잃게 된 로빈슨은 말 그대로 무자본의 무인도 2회차(?)를 시작하게 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방드르디의 존재이다. 방드르디는 더 이상 로빈슨의 노예가 아니다. 오히려 로빈슨의 친우이며, 때로는 그를 가르치는 존재에 가깝다. 무인도에서는 아무것도 없이 살아 오는 데 익숙한 방드르디, 그러니까 프라이데이가 우위에 있다. 어느새 로빈슨의 사고방식 또한 영국 요크 시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섬과 친구를, 그것들 자체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로빈슨에게 시간의 흐름, 문명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가치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스페란차에는 스페란차만의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은 로빈슨 크루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가야 하는 것들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스페란차의 질서를 배우며 경이를 느끼고, 이 질서를 점차 따르게 된다. 자연스레 '스페란차인'으로 거듭나게 된 로빈슨에게, 다시 찾아온 문명은 그저 짐덩어리에 불과하다.
미셸 투르니에는 서구의 백인 남성인 로빈슨 크루소가 '문명'을 무인도에 가져와 '교화'시키는 듯한 이야기를 뒤바꾸고자 했다. 그는 로빈슨이 더 이상 군림자가 아닌 섬을 꿈꿨다. 작품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작가의 고찰, 그리고 스페란차 나름의 질서를 인정하고 따르게 되는 로빈슨의 모습에 감명 받았다. 멋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워 보였달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숨가쁜 시간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로빈슨 크루소」를 가물하게라도 기억하는 독자라면, 더 재미있게 비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 글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고 필자의 감상과 생각을 담아 재구성한 글입니다. 작품 내 표현 또한 개인적인 재해석에 따라 모두 대체하였음을 밝힙니다. 인용처럼 보이는 부분은 대체한 말들입니다.
'깜빡의 서재 >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시작을 응원합니다!》 조재윤 외, 「제1회 전주동네책방문학상 - 그럼에도 불구하고」 (0) 2021.06.14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현대인의 문학 (0) 2021.06.08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모래, 모래, 모래! (0) 2021.05.10 문지혁,「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작가 30 (4) 2021.04.21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2) 202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