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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보(?): 이태준「달밤」, 성석제「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깜빡의 서재/함께 읽기 2021. 4. 2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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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덕희 외, <국어교과서 작품 읽기 고등 소설 (상) · (하)>, 창비, 2014. 

    개인적으로 이태준의 「달밤」, 그리고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두 작품을 읽으며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돌이켜 보면서 두 작품의 사건이나 인물이 뒤섞여 좀 고생했다. 주제별로 엮어본 책들, 첫 글로는 '바보'가 등장하는 작품인 이태준의 「달밤」, 그리고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소개해본다.


    공통점

    앞서 간단히 밝혔던 것처럼 두 작품은 닮은 점이 상당히 많다.


    1. 

    우선 두 작품 모두 '바보'라고 불리는 인물이 등장하며, 둘 다 '황'씨이다(굳이 순서대로 본다면 이 '황'씨의 기원은 1933년에 탄생한 황수건이겠지만, 굳이 따지지는 말기로 하자. 또한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다. 이 점을 꼭 유의하자). 개인적으로, 독자가 두 작품을 헷갈려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

    두 바보는 또한 비슷하게 생겼다. 다음은 「달밤」에서 '나'가 황수건을 처음 보고 그 외형을 묘사한 부분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황만근의 출생에 관해 다룬 내용을 함께 보면, 두 작품 모두 '짱구 머리'를 특징으로 하는 인물이 '바보'로 불린다는 걸 알 수 있다.


    3.

    그렇다면 두 '바보'를 통해 작품에서 거두고자 하는 효과는 뭘까? 우선 평범한 인물이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하는 '바보'는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상식에 맞는 행동을 하였을 때 그 효과는 부각된다. 동일한 행동을 하였을 때 우리가 인물에 따라 느끼게 되는 감상이 달라지는 것인데, 이러한 효과를 간단하게 틀어주기라고 말해보려 한다. 두 작품은 '틀어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마지막으로 두 작품은 구성이 무척 유사하다. 「달밤」의 ['나' - 황수건], 그리고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민씨 - 황만근] 사이에는 [관찰자 - 관찰 대상]의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시점과는 별개이다). 관찰의 구도로 인해 자연스레 이야기는 삽화의 구성이 된다. 관찰 대상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다양하게 보여주어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다양한 방향에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성이다.


    공통점에 대해 간단히 결론을 내보면, 얼핏 보면 두 작품을 헷갈릴 만하다. 큰 얼개에서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바보'의 등장이나 그 바보의 특징, 바보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존재와 삽화 형태의 이야기 흐름. 이러한 유사함은 결국 효과의 유사함으로 이어져, 두 작품 모두 '틀어주기'의 기법을 활용한 메시지 전달을 이루어내고 있다.


    차이점

    그렇다고 해서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의 표절작이냐... 하면 전혀 아니다. 두 작품은 공통점만큼 차이점도 많다. 사실 세부적인 부분 전부가 차이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

    결정적으로 두 작품은 배경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작품 발표 시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달밤」의 경우 1933년에,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2000년에 발표되었다. 70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셈인데, 후대에 쓰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배경이 농촌이고, 「달밤」의 배경이 ('시골'이라고는 했지만) 성북동이라는 게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두 작품의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인물의 직업 또한 다르다. 황만근의 경우 농민인 데 반해, 황수건의 직업은 학교 급사를 거쳐 신문 보조 배달원, 그리고 자영업으로 다양하다. 농민이 대다수인 황만근의 마을과는 달리 도시에 가까운 황수건의 동네에서는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황수건은 하고 싶은 일을 오랫동안 할 수는 없다.


    2.

    2-1

    엄연히 말해 '바보'의 의미, 더 나아가서 '틀어주기'의 효과 측면에서도 두 작품은 명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달밤」의 황수건은 '천진한 바보'다. 말이나 행동이 상식에 맞지 않지만 본인은 자신 있게 행동을 이어 간다. 물건을 훔치는 등 사회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감에 넘친다. 말 그대로 천진한 어린아이가 따로 없다.

     

    황수건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적어도 그의 행동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게 악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그를 한층 더 '바보'로 만든다. 「달밤의 '틀어주기'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황수건도 나름대로(그 방법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의리를 갚을 줄 안다는 점, 그리고 그 또한 인생의 무상감이나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천진한 바보'가 말이다.


    2-2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황만근의 경우 그의 부재를 마을 사람들이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이다.  그는 따지자면 '우직한 바보'인 셈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마을 사람들과 다르게 황만근은 우직하게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을 해 나간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게다가 안 좋은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한다는 점이 그를 '바보'로 만든다.

     

    물론 황만근 또한 '토끼 고개 이야기'처럼 허황된 말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설명해주는 신화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적어도 민 씨의 시점에서 보인 황만근은 ' 후년에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운 존재였다. 여기서 '틀어주기'는 몇 가지가 있을 텐데, '바보'라고 무시받던 황만근이 사실은 제일 성실한 인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바보'라고 멸시받던 황만근이 경운기를 누구보다 잘 몰고, 또 빚도 안 지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갔다는 게 아닐까 싶다(비극적인 최후는 그의 '바보 같음'이 문제라기보다는, 이장을 비롯한 다른 농민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3.

    마지막으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황만근의 일대기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 그의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모든 생애주기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달밤」에서는 황수건의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다. 이는 앞서 말했던 시점의 차이와도 연관된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 전지적 시점이기에 자연스레 황만근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지만, 「달밤」의 경우 1인칭 관찰자 시점이기에, 관찰자가 보고 들은 정보만 황수건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결론(?)

    두 작품은 엄밀히 구분하자면 전혀 다른 작품이지만,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많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바보'라는 소재가 웃음거리로 전락할 일은 더 없을지도 모르겠다. 특이한 누군가의 보편적인 이야기, 정도로 두 작품을 바라보는 게 좋지 않을까.

     

    위 글은 <달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에 따라 두 작품을 비교 분석하여 재구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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