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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의미의 기다림
    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10. 1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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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가져왔습니다. 저의 감상을 병렬적으로 작게 작게 적어 보았습니다.

    방문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시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

     

     

     

     

     


    총평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일어날 일들

    아니,

    이미 일어나고 있을 일들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2005

     

     

     

     

     

     

    # 이런 분께 추천, 안 추천

    연극 대본을 읽기보다 실제 연극 공연 보기를 선호한다면 이 책은 읽을 이유가 없다. 물론 실제 공연과 다른 맛이 있으니, 추천은 드리고 싶다. 의미 없는 말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부조리극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은 그 개념을 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좋아하는 여러분이라면, 이미 이 작품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여러 번 읽으면서 곱씹을 책이 필요하다면, 이 책이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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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고도도 기다림도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이 작품을 '를'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까? 군대에 있을 때 햄소시지찌개를 '햄소찌'로 줄여 부르는 관행이 있었다. 어느 날 일을 하고 밥을 먹으러 갔더니 햄도 소시지도 없었다. 그때 우스갯소리로 국을 바라보며 '찌'라고 불렀다. 햄도 소시지도 없으니, 남은 건 '찌'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서 제목을 '블라디미르가 기다린다'라든지, '포조가 지나간다'는 식으로 적었다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틀린 말도 아닌데. 이 고민을 하면서 반대로 '고도'와 '기다린다'가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며, 그것이 이 대본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담하는데, 이 작품 제목을 '한 그루의 나무 아래'로 지었다면 결코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아님 말고).

     

    # 당근

    대본과는 결코 상관 없는 감상이다. 어릴 적 당근과 사과를 함께 갈아서 마셨던 기억이 있다. 유난스럽게 달았다. 얼마 전 카레를 만들려고 당근을 사 온 일이 있다. 되게 쓴 냄새가 났는데, 막상 작게 썰어 한 입 먹으니 달았다. 뒷맛이 썼지만. 다큐멘터리를 본 어렴풋한 기억들 중 당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왜 벅스 버니는 그렇게 길고 주황빛이 도는 당근을 신나게 씹어 먹었을까? 우리나라에서 나는 당근과 다른 품종일 외국의 어떤 당근은 실제로 단맛만 강하다고 한다. 당근과 사과를 합친 그런 맛이 날까? 그거라면 에스트라공이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을 만하다.

     

    # 고고와 디디

    번역본만 줄창 읽는 필자의 입장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원본과 같은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고고와 디디'라는 애칭이 많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묘하게 다르지만 두 인물의 애칭을 조합해 보면 '고디'라는, '고도'와 무척이나 유사한 단어가 된다. 고도를 기다린다는 건 어쩌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서로 하나 되기를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닐까. 높은 확률로 아닐 듯하다. 그렇다면 다음 가설. 어쩌면 '고도'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흔한 이름이 아닐까? 그래서 애칭의 조합으로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이름인 것이다. 어쩌면 '고도'라는 이름도 애칭이 아닐까? 실제 이름은 따로 있지 않을까?

     

    이 모든 건 고도가 오지 않기에 밝혀질 수 없고, 결국 독자는 대본의 처음에서 끝까지 함께 기다리게 된다. 고고와 디디를 떠올리면서.

     

    # 모르는 채 기다리기

    '고도'를 기다린다는 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어떤 의미일까? 알 수 없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는, 모르는 거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다린다. 이 모습이 왠지 현실과도 닮아 있다 느껴졌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아가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아무리 확실하고 강한 목표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고 윤색된다. 정신적인 목표일수록 그러기 쉽다고 느껴진다.

     

    때때로 목표를 갱신하지 않는 건 모르는 채 기다리는 것과 같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뭔가? 오늘이 며칠인지 모를 정도로 스스로를 밀어 붙이고 있는데 그 행동들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없다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다.

     

    # 럭키와 연설

    벤자민 그래함의 <논증의 탄생>에 따르면, 인간은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의 절반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논리성이 결여되어버린 생각이 실제 음성으로 도출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예시로 니체는 자신의 농담을 통해 진리를 설파하려다 되려 본인이 걸려 넘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생활 속 예시를 보면 이 현상이 자명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2021년 스탠퍼드 대학 뇌과학 연구실에서 수행된 연구에 따르면, 실험자의 90%가 주어진 스크립트에 대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을 때 동일한 생각을 글로 적은 것의 48% 정도밖에 인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럭키가 유일하게 경탄을 자아내는 순간은 (필자가 보기에) 그가 생각을 읊을 때이다. 럭키의 생각은 위에 필자가 써놓은 헛소리처럼(주장을 제외한 모든 자료는 사실이 아니다) 말도 안 되지만 조금 더 이해할 수 없다. 그 말들이 어려운 단어를 이용해 세상에 나타났을 때 인물들은 경탄하고, 럭키는 고통스러워한다.

     

    첫 문단에서 필자가 작성한 말들에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느껴졌다면, 우리는 전문적인 이야기나 숫자들이 때로는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대본을 읽으며 느꼈다.

    # 최근 소설 중에도 논문의 형식을 베껴 허구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들이 있다. 가끔은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사실처럼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박형서,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참고)

     

    # 의미의 기다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다리고 있는 건 명확히 말하면 '고도'는 아니다. 누군가 하얀 거짓말을 해볼 생각을 품었다면, 금세 대본은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모든 것일지도.

     

    이 대본은 SF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자리잡고 있는 공간에 망각 가스가 주기적으로 살포된다거나, 시간축을 비트는 중력 왜곡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날짜도 장소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 시간이, 그 공간이 의미를 가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독자가 두 인물의 시간에 개입하면서 두 인물, 정확히는 블라디미르가 서서히 깨어난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면 포조도 소년도 수도 없이 많은 '0막'에 등장했을 것 같다. 그런데 독자가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서 균열이 생겼다. 블라디미르는 시간을, 인물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읽힌다'는 의미를 얻었기 때문(공연이었다면 '보인다'로 문장을 바꾸었을 것이다)일까?

     

    # 글을 마무리하며

    이 대본은 약 세 번 정도 읽었고, 실력이 출중한 아마추어 팀의 공연도 한 번 본 적이 있다(각색본이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을 줘서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보면 설명하고 싶어 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정식으로 공연을 보러 가고 싶다 생각했다.

    # 부록: 함께 보면 좋을 이야기들

     

    외젠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세 편의 현대 희곡이 담겨 있다. 앞서 <밤으로의 긴 여로> 리뷰에서도 밝혔지만, 희곡 작품을 보고 있으면 공연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녀석의 경우에는... 혜화역 공원 쪽에서 간혹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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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오싱젠, 「버스 정류장」

    세 개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어, 현대에 읽어도 충분히 재밌다. 개인적으로 희곡을 읽어 본 기억이 크게 없는데, 현대적인 감각의 희곡은 텍스트로 보아도 매력적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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