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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후에는 주름이 남을 수 있습니다.이야기 공방/에세이(?) 2021. 4. 20. 22:12
거울을 보는데 없던 팔자주름이 보였다. 볼을 팽팽하게 펴봤지만 손을 놓으면 다시 제자리. 효과가 없었다. 교정 치료 3년 간 부정교합으로 고생하던 아랫니는 반영구 철사에 의지한 채 가지런해졌고, 삶의 질이 올라간 것 같아 만족스럽다. 고른 이빨을 가지게 된 대신 주름이 생겼다. 장기간 교정기가 튀어나온 상태로 있다 보니 피부가 과도하게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교정이 끝났을 때 피부가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은 거다.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겪기 전까지 그렇게 크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문득 실없는 비유를 생각해 냈다. 그러니까 고른 이빨이라는 장점을 얻어내기 위해 난 노력을 했고,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인 주름이 생기게 되었다. 개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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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4. 19. 22:23
이상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의 눈에 찬다. 이상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적은 글을 발견하고, 어떻게 자신이 이상한지 적은 글을 남긴다. 그런 글이다. 에 등장하는 하리 할러, 그러니까 는 그의 이명(異名)에 걸맞게 '내향성과 고독, 야생성, 불안, 향수, 고향 상실'을 지닌 존재다. 그는 묘한 '마력'의 소유자이며, '고통'을 항상 몸에 담고 있다. 그렇지만 하리 할러는 겉보기엔 음울해 보이는, 종잡을 수 없는 사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이 사내는 친절하게 를 남긴다. 이 수기에 쓰인 내용은 하리 할러의 삶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 짧은 순간이 하리를 확 바꾸게 된다. 하리는 '스스로 자신을' 라고 주장했다. '공허의 흑염룡'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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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명랑한 밤길」속 음악깜빡의 서재/책과 음악 2021. 4. 18. 11:11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으면 뭔가 와 닿는 느낌을 받고, 다시 찾아서 듣게 된다. 음악은 인간의 희노애락, 인생, 그리고 경험을 모두 담은 것이다. 그렇기에 음악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혹은 속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명랑한 밤길」에 나오는 음악들은 동시대를 살아온 독자들에게는 친숙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음악 체험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간접 경험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음악과 텍스트를 함께 보면서, 인물들이 어떤 감정으로 소설 속 말과 행동을 하는지 한번 상상해 보면 좋겠다. 우선 첫 페이지 짤막한 가사들로 나왔던 곡들을 소개해 본다. 네 곡 모두 감성적인 발라드인 건 비 내리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 조용필,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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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4. 17. 23:45
세 번째 읽는데, 지난 두 번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그 전에는 '기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다지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는데,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여운에 남았다. 총평 세상을 관조하는 이미 포기해버린 듯한, 그런 기린. 사진 출처: unsplash Jessica Bateman 작품에서 아버지는 이미 삶의 의지를 상실했거나, 혹은 속세를 벗어나 버렸다고 느껴진다. IMF 당시를 말 그대로 풍문으로만 들은 세대로서, 납치당하는 사람들의 일상성은 필자에게는 말 그대로 쇼킹한 무언가였다. 사람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한 시절을 견뎌온,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아무튼 기린은 그 풍파를 결국 인류의 모습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존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