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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하영 외,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동네서점 Edition
    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7. 20.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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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별 작품에 대한 짧은 감상은, 블로그 내 '짧게 읽는' 게시글에 작품별로 보다 간단히 정리해 두었습니다.

     


    총평
    사회적인 문제가
    더 이상 고발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꿉니다.

    글을 통한 시도가
    그런 미래로 가는
    열쇠이길 바랍니다.


    전하영 외,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1


     

     

    #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함에 앞서, 잠깐 위의 도서에 대해 한 마디 하고 가려합니다. 자랑하고 싶습니다
    - 실은 책을 산 지 꽤 오래됐습니다. 그동안 세계문학전집을 읽느라 차일피일 미뤄오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 아무튼 저희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 정도에 동네 서점이 있는데요, 규모가 나름 큰 곳이고 인테리어도 좋아서 바빠지기 전까지는 무척 애용했습니다(꾸메 문고라고 아시나요!). 이미 알라딘을 통해 도서를 구매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서점에 들어갔는데 바로 이! 동네서점 에디션이 있지 뭡니까!

    -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사실 인쇄 도서를 제 때 맞춰 사는 것의 이점 중 하나가 이런 '한정판'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ㅎㅎ 결국 구매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저의 책장의 소중한 일원이 되었습니다.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것들을 접할 때마다, 아직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느낀다. 과거의 것들이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 미치는 상관관계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그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흑백 영화라든가, 오래된 블루스라든가, LP라든가 하는 것들을 찾아다니며 웃을 수 있게 될까.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대해 생각했다. 십 년을 더해도 아직 먼 곳. 주위의 어른들은 거쳐갔고 사촌들은 곧 거쳐갈,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직 먼 곳. 먼 시간은 그만큼 많은 것을 품고 있고, 가끔, 아니 때때로 그 시간들은 수정되어야 할 때가 있다.

    필자도 파리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대학교 1학년의 패기로, 학기가 시작했는데 간 가족여행의 끝은 비행기 연착이었다. 혼자 하루를 더 체류하며 프랑스어만 가능한 30대의 남성 분께 미안하다는 영어밖에 할 수 없었다. 항공사에서 건네준 바우처로 사 먹던 지나치게 큰 에클레어, 생판 몰랐지만 함께 아침을 먹고 대화를 나눠주시던 중년의 여성 분도 떠오른다. 회사 일로 오셨다는 남녀 직원분과 택시를 도맡아 부르던 최연소의 필자가 떠오른다.

    같은 나이임에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 또는 일어났을 일들, 혹은 일어날 확률이 적었을 일들을 다시 돌아본다. 돌아보면서 생각하고, 회상하고, 자책해 본다. 이 작품과 같은 것들을 조금 더, 아니 정말 많이 접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서른일곱의 장 피에르가 되고 싶어 할 스스로가 떠오를 것 같다.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될 수도 없겠지만).

    육체란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인가, 본능으로 살아가는 존재인가. 우리가 쓰고 읽고 거기에 대해 말하는 존재라면, 이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좀 더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어린 시절에 대해 장 피에르가 한 말이 너무도 , 뼈아프게 다가온다.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작품을 읽다 말고 피아노 연주를 하러 다녀왔다. 두 차례에 걸쳐 읽은 책은, 그만큼의 용기와 생각을 품어야 읽을 수 있었다. 아직도 새로운 것을 접하는 마음은 그렇게 말랑하지 못하다.

    차별 없는, 존중하는, 배려하는, 민주적인. 일련의 단어를 내뱉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와 힘, 용기를 알아내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것들을 외면하면서, 그것들을 직면할 용기가 없으면서 대사들을 읊는 건... 온당하지 않다.

    체의 대사를 보고 있으면 인지적인 부담이 든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괜히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한 꺼풀 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답답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 텐데 답답한 것이 표면에 도사리고 있는 게, 차라리 좋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거두지 않는 씨앗을 뿌리는 '마음씨'는 생각 외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재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남아 생활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받아야 한다. 부모님의 사랑과 지원이 없이는 자라나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재화를 매개로 수많은 거래를 해야 살 수 있는 것이 현대 사회다. 만일 살아가는 동안 행복했다면, 다시 나눠주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다.


    끝으로 퀴어와 장애에 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건 그만큼 문단이라는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 그리고 시기를 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와 다른 것들도 존재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또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이 존중이고 배려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중하고 배려하지 못하면, 나 또한 존중받고 배려받지 못할 것이다. 악순환보다는 선순환이 좋다. 그래서 피아노를 치며 스스로에게, 작품에 답답해하면서도 끝까지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러한 것들을 몰랐던 15년 넘는 세월을 금세 좁히기는 어렵겠지만, 착실하고 꾸준히 노력해보려 한다. 물론, 빠르게!


    김지연, 사랑하는 일

    '사랑'이란 뭘까? 끌림은 육체적인 것을 담보로 하는가? 그렇다면 친밀한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을까? 사랑은 일견 명쾌해 보인다. '사랑한다'는 말만 내뱉으면, 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해도 사랑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두렵다. 나를 둘러싼 주변의 시선도 두렵고, 그것에 정면으로 인상 쓸 수 없는 것이 두렵고, 그것에 인상 쓸 만큼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그런 점에서 멋있게 느껴진다. 자신의 시선에서 자신감 있게 세상을 바라보고, 또 의견을 피력한다. 그것이 기존의 시선과는 사뭇 다른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인간은 주관적인 생물체이고, 그 주관에는 호도 불호도 있다. 여러 작품을 접한다는 건 나의 호와 불호를 파악하고, 그것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한 작업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도 생각보다 신선했고, 강렬했고, 그러면서도 갸우뚱했다. 아직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반사적인 반응들을 조정해 가는 것 또한, 배워가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라고 느낀다. 노력하는 건, 그저 체념하는 것보다는 분명 나은 일일 테니까.

    이상, 시스젠더 헤테로의, 나는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도 받아들여 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끝으로 친밀함과 사랑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잘 지내고 싶다'가 친밀함이라면 '잘해주고 싶다'는 사랑이 아닐까. 혹시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잘 대해줄 수 있다면, 그렇게 꼭 하기를 바란다.


    김혜진, 목화맨션
    집값이 연일 오르고 올라 더 이상 올려다볼 수도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고, 목화맨션도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정겨운 이름과 그에 걸맞은 인정만은 특별했다. 처음에는 말이다.

    최근 필자도 자취방을 구했다. 복학을 해야 해서 구했는데, 수업이 대면으로 이루어질지를 고민하다 보면 굳이 구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직 정식으로 옮기지 않은 방에는 전 세입자가 신경 쓰지 않고 두고 간 하자들로 가득하다. 켜지지 않는 현관 등, 눌리지 않는 인터콤, 잘 닫히지 않는 창문. 거기에 지갑에는 등록이 안 된 현관 카드키 두 개. 허심탄회하게 중년의 관리인 분께 모든 걸 한 번에 말할 수도 있지만, 아직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중개 정도만 해주고, 직접 처리해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서울로 이사 온 것도 아닌데 일정을 잡고 일을 처리하기가 부담스럽다.

    목화맨션의 집주인과 세입자는 특별한 관계였어야 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국은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그 지점이 현실적이었고, 사실 딱히 서글프지도 않았다. 금전을 기반으로 한 관계라는 건, 서서한 줄다리기 속에서 서로 최소한의 예의만큼의 힘만 빼둔 거니까.

    한편 삶이라는 건 참 지탱하기가 어려운 널뛰기 판 같다고도 느낀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정말 쉽고, 넉넉하다기보다 정말 넘칠 만치 우리는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만 또 그렇게 준비를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그러다 보면 갑자기 무너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돈다발을 던지기 어려워진다. 반대쪽 판 균형을 맞추려고 돈다발을 던지다 보면 몸무게가 줄어서, 결국 무너져 버리니까.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필자는 게임을 잘하지 못한다. 실은 혼자 하는 게임이 좋다. 경쟁하는 게임은 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받고, 욕지거리도 들어야 한다. 어린 시절 버블파이터 할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공부에 가까운 게임들을 볼 때마다 엄두가 안 난다.

    단편 분량에 이야기가 정말 다채롭게 녹아들어 있어서 놀랐다. 그리고 그 발상에 놀랐다. 요새 코딩 과외도 하는 걸 생각하면 게임을 과외한다는 발상 자체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그랬다.

    담임교사에 대한 삽화는 마음이 아프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 걸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입장에서 그 삽화가 들어 있다는 건 굉장한 고통이다. 공정하게 맡은 바 일을 처리하는 전문직의 모습을 동경하고 싶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게임 세상에서의 '엄마'라는 단어에 대해 다룬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이 어머니와 관련된 말을 '패드립'이라는 범주에 묶어 사용하는 것을 보며 놀라고 우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물론 '엄마'라는 단어 자체를 욕설로 쓰는 건 본 적이 없지만). 문제인 건 알았는데,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그 뉴스 기사를 보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쓰던 말들에 반성했었고,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아이들은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며, 생각보다 더 서슴없이 혐오 표현이나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 무지성적인 욕설은 듣는 사람에게도, 하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알려주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형태의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게 된다.

    끝으로 필자 또한 초등학교 때 살이 굉장히 쪘었다(중1 때 10cm 정도 크면서 빠졌지만... 키는 여전히 작다!). 다행히 학급 친구들은 친절했고, 초등학교 때의 나는 즐거웠다. 중학교 때의 기억들은 사뭇 다른데, 괴롭히거나 괴롭힘 당하는 좋지 않은 기억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의 무지성했던 나를 반성하고, 또 되새기게 되는 이유이다. 작품을 통해 한 번 더, 그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고, 한 번 더 나아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요새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주로 한다. 멀티적인 요소가 있지만 필자는 주로 혼자다. 마인크래프트 속 동물들은 성별이 따로 없고, 주인공 또한 중성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변화해 왔다(물론 남녀 캐릭터가 모두 생기게 되었지만). 이런저런 요소로 인해 최근 19금 게임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내부의 교육적인 요소만 모은다면 충분히 좋은 메시지를 전달할 게임이 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운전이나 게임 모두 여성의 능력을 낮춰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시선을 줄인다면 어느새 누구나 즐겁게 달리는 도로와 즐겁게 하는 게임 생태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정적인 시선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고, 위축된 마음이 실수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서이제, 0%를 향하여
    S0# 소설은 기록이다. 기록이라는 목적에 보다 충실해진 작품으로 이 작품과, 정지돈 작가님의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도가 있다.

    S0#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볼 때마다 짠내가 나는데, 우리가 보는 영화에서는 왜 돈 냄새가 나는지, 항상 의문스럽다.

    S0# 고등학교 때 일종의 특별활동으로 독립영화를 보는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압구정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왼쪽으로 몸을 틀고 직진하면 CGV가 있다. 지하에는 CGV 아트하우스가 있다.

    S0# <보이후드>라는 영화를 보았다. <메밀꽃 필 무렵, 운수 좋은 날, 봄봄>도 봤다. 픽사에서 만든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들도 감상했다. 소설에 나오는 류의 작품은 하나도 못 봤다.

    S0# 문학이든 영화든 예술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돈에 연연하지 않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자유로우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예술은 직업이 아니라 취미가 되어야 하는 걸까?

    S0# 독립영화라는 장르는 할리우드의 저예산 영화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쉽고 그만큼 어려운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S0# 얼마 전 <블랙 위도우>를 보며 더 이상 현실과 구분 가지 않는 CG에 감탄했다. 더 이상 현실과 접점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독립도, 어딘가에는 있을까.


    한정현,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조선시대 성소수자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라는 점에서, 소설은 첫 번째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 의미가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소설은 두 번째 의미를 얻는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평등하게 바꾸어 주리라 믿는다. 천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바뀔 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던 일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이어서는 안 되고, 이를테면 '과학 인간'이어야 한다. 그런 전환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과학과 기술은 우리를 평등하게 바꿀 준비를 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정보들을 많이 접할 수 있어 흥미롭고 좋았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역사는 주류의 편집본'이라는 생각과,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똑같다'는 생각을 느꼈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은 과학자였다. 아직도 SF 소설을 사랑한다. 필자는 요즈음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지점들을 생각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축복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건 축복이라기보다는, 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업을 쌓아가고 있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동안 무심결에 하던 말이나 행동, 생각들을 검열하고 반성하고 있다. 불순물을 빼내어 담금질을 하려면,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솔직히, 아직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짧은 마무리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 항의를 하고 다투는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화해할 가능성이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것만큼 남의 것도 소중한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여담이지만,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정말 멋졌다. 이런 멋진 수준의 글을 써낼 힘이 아직은 없다. 그렇지만, 말하고 싶은 새로운 것이 생기면 그때, 제대로 된 글을 꼭 쓰고 말 거다. 멋진 글을 볼 때마다 이런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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