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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공방/소설 2021. 6. 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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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상적으로 지친 일상에도, 오늘도 하루하루 벌어가는 분들이 멋집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저의 순수한 창작물입니다. 더 큰 규모의 작품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으니, 감상만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상이나 피드백을 댓글로 공유해 주시면, 꼭 답글 달겠습니다.  

     

    핏물이 밴 손수건에서는 연신 흥건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에 젖은 피는 무겁게 착, 하고 타일에 붙었다. 잠을  마지막으로 언제쯤 잔 것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욕실에는 두루마리 휴지와 119에 전화할 수 있는 연락 수단이 필요했다. 그것도 많이.

     

    "10분 뒤에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30분 전에 회의가 있었다. 회의를 마친 지 2분 정도 되었다. 또 다른 회의가 시작된다.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올리는 일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도, 모두 당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10장에 처참하게 파쇄되어 버렸다. 속으로 울분을 삼켰지만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흔히들 단톡방에 갠톡인 줄 착각하고 헛소리를 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데, 울분을 뱉었다가는 그런 클리셰적인 실수를 적극적인 고의성에 기반해 저질러버릴 것 같았다.

     

    난 25살부터 혈액의 총량이 고정되지 않는 희귀병에 걸렸다. 출혈을 입는다? 수혈하지 않으면 사라진 피는 복구되지 않는다. 몸 속을 돌아다니던 적혈구가 사망하면? 역시 복구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수혈해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병원비를 부담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일을 해야 했다.

     

    특별한 계획 없는 경영학과는 취업난에 직격으로 어퍼컷을 맞아버리는 수순을 거치며 현실감각을 안았다. 하필이면 졸업하던 해에 취업 박람회가 줄줄이 취소되는 통에, 실낱같다고 여겼던 기회조차 잡기가 어렵게 되어버렸다. 평생 아날로그에 익숙하게 살아온 P에게, 모든 연결이 단절되어버리는 고통은 병원에 가야 하는 고통보다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했다.

     

    빠르게 딛고 일어나기 위해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터를 바꾸며 저녁에는 이력서를 검토하는 삶이 이어졌다. 지치지 않기 위해서, 정확히 말하면 지치면 으레 클리셰적으로 흘린다는 코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에너지 드링크를 퍼 마셨다. 25번째 회사에서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했고, 면접이 하나였던 P는 남들이 면접 5개를 준비할 기력을 모두 하나에 쏟아부을 수 있었고, 그렇게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회사라고 해봐야 규모가 크지 않아 직원은 30명 내외. 이제 막 거래처들과 인연을 터 가고 있던 통에 회식 자리에 불려가기 일쑤였고, 거기에다 살인적인 업무량은 직원이 들어오자마자 퇴사하려고 발버둥 치는 진풍경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떨어져 내리려는 고개를 붙잡고 보고서를 검토해야 했다. 엑셀 파일을 분석하고 전에 해본 적도 없던 코딩을 배워야 했다. 

     

    처음으로 코피가 난 것은 초등학생 때였는데 길을 가다 회전하는 농구공에 안면부가 갈려나갈 듯 부닥치고 나서였다. 멍울멍울 떨어져 내리는 코피는 아프지는 않았고 불편하고 메스꺼웠다. 그 이후 병원에 가 치료를 받기 전까지 P는 40차례 정도의 코피를 흘렸었다. 25살 이후로 처음으로 코피가 난 것은 바로 회사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지 50일 차가 지났을 때였다.

     

    "10분 뒤에 회의 시작합니다. 준비해 주세요."

     

    비슷한 말을 수도 없이 듣고서야 본인의 개인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던 어느 날이었다. P는 무심코 졸린 고개를 착, 하고 수그렸다. 그때

    울컥, 하고 무언가가 흘러 나왔다. P는 잠이 액체와 함께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 액체는 P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의 피부 세포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핏물이 밴 손수건에서는 연신 흥건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서둘러 두루마리 휴지를 말아 코에 집어넣었다. 통증은 전무하지만 메스꺼움과 어지러움으로 볼 때 빈혈 증상이다. 너무 서둘렀는지 휴지 끄트머리가 물에 젖었다. 코피는 휴지를 자양분 삼아 전진하다 물과 만난다. 물에 젖은 피는 무겁게 착, 하고 타일에 붙었다.

     

    잠을  마지막으로 언제쯤 잔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나 잤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건 P가 '기절했다'를 '잠들었다'와 동의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념을 지속할 기회는 많지 않았는데 숨을 쉬는 작은 구멍에서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폰 액정을 두들겨 긴급 전화를 찾았다. 특이한 P의 상황은 119 신고 내역에 언제나 '기타'로 표기될 예정이었다.

     

    "119입니다. 말씀하세요."

     

    "피가 안 멈춰요."

     

    "혹시 현재 위치가 어떻게 계십니까."

     

    "집이요."

     

    "구조 위해 휴대전화 위치추적 실시하겠습니다. 혹시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코...피가 나요."

     

    "예?"

     

    "저 P입니다. '혈액수급 이상증' 환자고요. 지금 코피가 나는데 빈혈기가 돌아요."

     

    P는 25살 여름 길가에서 넘어져 죽을 뻔한 이후 구조되는 과정에서 '혈액수급 이상증'이라는 병명을 얻었다. 그 이름은 당시 그를 진찰해 준 동네 병원 의사가 지어준 이름이었는데, 말하면서 굉장히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다. 어찌 되었든 '혈액수급 이상증'이라는 병명은 국내에 P 하나뿐이고, 혹시라도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119 데이터베이스에 그의 신원 정보와 병명을 등록해 둔 사애였다. 

     

    "잠시만요."

     

    당황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끊기더니 정적이 흘렀다. 짧은 순간에도 사경을 헤매는 상상을 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지만, 그 와중에 웃기게도 '차라리 보고서를 쓰는 도중이었다면 참 좋았겠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냥 농땡이 피우며 야근 수당이나 챙겨 먹으려는 희귀병 환자가(회사에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 대목은 패스) 코나 파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 것 같지 않은가.

     

    "네, P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 위치추적 완료되었고, 해당 지점으로 구급대원이 출발하였으니 조금만 힘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 말을 끝으로 P는 진이 빠져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핑 도는 현기증을 느끼며 P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작은, 그것도 아주 작은 규모의 회사에는 같이 야근을 해 줄 동료 신입사원도 없고 순찰을 돌아주는 감사한 경비 아저씨도 없다. 아마 지금쯤 자고 있겠지. 나도 자고 싶다. P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끈적하게 이어지는 생각들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생각도 정신도 혈액과 함께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P의 일부는 이제 영원히 콘크리트 바닥에 흡착되어, 누군가 대걸레보다 좋은 무언가로 바닥을 닦아주기를 기다릴 테였다. 

     

    다음날 단톡방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쓰러졌는데 과로 진단받아서 강제로 입원 중입니다. 더 열심히 할 테니, 급하게 휴가 하루만 쓰겠습니다. 다시 한번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

     

    "5분 뒤 회의 시작합니다. 각자 보고할 자료 출력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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