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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형의 시선
    이야기 공방/소설 2021. 5. 1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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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순수한 창작물입니다.

     

    배와 등이 붙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왔습니다. 배가 고파서는 아니었어요. 내 속엔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할 심장조차 있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2012년 5월 23일에 공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축축한, 생쥐 냄새가 나는 그런 공장은 아니었구요. 그보다는 좀 더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장소였어요. 뱃가죽이 등가죽에 실제로 달라붙은, 머리만 볼록한 인형들이 줄지어서 솜 채우는 곳으로 갔습니다. 홀쭉해진 배와 등이 펌프질 한 번에 살을 되찾고, 뼈를 얻지는 못하고, 그렇지만 얇디얇고 이모티콘처럼 생긴 심장을 얻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렇게 탄생된 생명들은 트레일러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흘러다녔어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죠. 나의 경우에는, 당신이요.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이 그 때였어요. 어린 아이답게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사실 벌써 7년도 넘은 이야기지만, 생각보다 인형을 사기엔 적합하지 않아 보였던 당신이 기뻐 하는 것에 당황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저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뻐서, 그다지 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어요. 애초에 할 말이 있더라도 저에게는 권리가 없지요. 지금에서야 알아차렸답니다. 웃기게도요.

     

    인형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장식품이 되어 하염없이 한 장소만을 둘러 보는 건 조금 너무하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VR 기계 속에 갇혀 사지를 쓰지 못하는 게임 캐릭터같은 기분으로 하루, 한달, 일 년을 있었습니다. 소꿉놀이를 할 나이도, 인형과 대화를 할 나이도 아닌 당신은 처음에는 저를 들고 이리저리 위치를 옮겨주기도 했어요. 좋은 위치를 찾고 있었던 모양인데, 저로서는 무척 감사한 일이었지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런 일이 있으면 힘이 났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형 적령기가 지난 당신은 저를 바라보고 그냥 지나칠 뿐이었지요. 감정을 뿌려 주지 않으면 제 심장은 금방 얇아집니다. 얇아져서 바스라져요. 그렇지만 바스라질 때까지 말은 끝끝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입은 입인데 바느질된 입이라서 그랬어요. 아마 사람도 저같은 입을 가지면 말, 못할걸요.

     

    이사라는 것을 두 차례 정도 했습니다. 이사에 가는 동안 저는 다른 인형들과 함께 마분지 상자 안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모두 입은 있었지만 말은 할 수 없었고, 눈은 있었지만 눈꺼풀이 없었습니다. 감기지 않는 눈을 떴지만 이미 초점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요. 2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저는 연옥을 체험했습니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 헤매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 공포심에 저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때 심장은 바스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그저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는 한 마리 인형일 뿐이지요. 그렇지만 내 안쪽은 이미 곰팡내 나는 솜으로 가득 찼습니다. 얇디얇은 심장은 사방으로 흩어져 깨진 상감청자처럼 되어 버렸어요. 빨간 옷을 입은 나는 당신의 옷을 물려 입고 당신의 방에서 당신과 함께 있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함께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방에서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무료로 장난감을 기증하는 공간이 있다구요. 저는 그곳에 꼭 가고 싶어요. 깨진 조각을 조심조심 모아서 공처럼 뭉쳐줄 아이를, 아니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제 입도 열릴까요. 제 입이 열린다면 저는... 꼭 '고맙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고맙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하고 싶어요. 꼭.

     

    끝으로 저와 같은 존재들이 있다면, 온 힘을 다해 움직이세요. 온 힘을 다해 소리 지르고, 온 힘을 다해 고개를 흔드세요. 그런데도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나와 함께 떠납시다.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함께 입을 열고 노래를 불러요. 춤도 추고, 강강술래도 돌아요. 재미있겠죠,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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