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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편] 떠도는 편지
    이야기 공방/소설 2021. 5. 4.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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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순수 창작물입니다(제작중입니다).

    1.

    안녕. B야. 그러니까, 나야. 날 기억할거라 믿지만, 어쩌면 그렇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내 약자를 보고 기억이 나는 사람이 없다면, 죄송하지만 당신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 편지에 대해 잊어주세요. 이미 잊기에 어렵다면, 그냥 태워주세요. 아, 라이터를 쓰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일수도 있겠네. 그럼 그냥... 괜히 무리하지 말고... 그냥 근처 시냇물에 살포시 올려둬주면 고맙겠어. 언젠가 내가 다시 찾아갈 수 있게. 음... 이제 너라고 믿을게. 잠시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이야기 시작할게.

     

    무척 긴 시간을 고민하다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사실 주소를 알고 있는데, 다시 보니 왠지 확실치 않더라. 그리고 정말 그 주소로 보내면... 아니다. 그냥 확실치 않았던 거로 할게. 그래도 너가 있는 동네는 무척 작은 곳이니까. 아직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편지를 옮겨둘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이런 식으로 부연설명을 해주겠지? 아, 분명 이름은 맞는데... 이게 주소가 정확하지가 않네요. 혹시 받는 사람 이름이 맞나요? 그럼 안 받기가 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싶었어. 뒷면에 '주소보다 이름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써놓기는 했는데, 원체 글씨 크기가 작아서 못 알아보실지도 몰라. 노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예전에 기억나? 내가 건강검진에서 눈을 너무 꼭 감고 있던 탓에 오른쪽 다음으로 잰 왼쪽 눈 시력이 반토막이 난거? 그때 넌 노안이 온 게 아니냐고 물었었지. 노안이 그렇게 빨리 올리가 없는데. 이젠 다시 건강검진을 받기도 쉽지 않을테니... 노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어렵겠다.

     

    갑자기 다른 길로 새버렸네. 음음, 본론을 슬슬 말해보려고 해.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 사과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나도 너도 세상을 알아가던 중이었지만, 내가 너의 세상을 한층 어둡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실제로 요즘 우리가 마주할 하늘처럼. 그래도 전부 미성숙하고 바보같은 짓이었다고, 그렇게만은 말할 수가 없어. 왜나면... 그 때의 내가 충분히 고민해서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들이었거든. 원래 과학 실험도 처음 하면 실수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잖아. 우리 일에 과학 선생님이 없어서 발생해버린... 일종의  실패한 실험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예전에 임용시험 준비할 때 봤던 시 기억나?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그 시가 지금 보면 예언서처럼 느껴지기도 해. 낙진이 시작될 즈음에서야 그동안 시에서 빠져나가던 예산이 보도블럭이나 버스 정류장 교체에 쓰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 그나마도 거대도시들 위주였지만, 너희 동네는 시 내부에 있는 마을이니, 무사하다고 믿고 있어. 어쨌든 언젠가 우리도 이 쇠항아리를 깨고 나가서,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겠지? 내가, 아니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 꼭 그 일이 일어나길.

     

    난 말이야, 그 일이 있고 나서 하루에 두 번 정도 널 생각하곤 했어. 처음 한 달은 널 생각하면서 울었어. 그 다음 한 달은 널 생각하면서 화를 냈고, 그 다음 한 달은 웃었어. 거짓말처럼 그 다음에는 울게 되더라. 어쩌면 체념같은 거겠지. 어쩌면 그냥 감정을 소모할 대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어. 여기 사람들은 다들 생기가 없거든. 사실 나도 그래. 공기는 퀴퀴하고, 사시사철 LED 불빛에만 의존해야 하는데 누가 생기 넘칠 수 있을까. 가로막혀 있음을 이토록 강렬하게 실감할 수 있는지 몰랐어. 몰랐다고 너무 갑작스럽게 알게 돼서, 상실이라는 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리고 길게 찾아오는 꼬리표같은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사면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아쉽게도 우리가 모두 아는, 분지로 유명한 그곳은 아니야. 그렇게 넓고 번화한 곳이라면 이렇게 갇힌 기분이 들지도 않았겠지. 그냥 산과 산 사이 어딘가야. 조선시대 같았으면 작은 화전민촌 정도 느낌이지 않을까? 화전 대신 콘크리트 건물과 철조망으로 되어 있다는 게 다를 뿐이지. 가끔 강남거리가 그리워. 참 사람이 많았는데. 북적대는 걸 우리는 참 싫어했지. 그런데 막상 그게 싫었던 건, 우리가 그걸 누릴 자유를 가지고 있었어서였나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계속 본론으로 들어가기 망설여지나봐. 내가 이렇게 빙빙 돌리는 이유는 말하기 어렵기 때문인데, 말하기 어려운 이유를 말하라면 한 두 장 정도로는 끝이 안 날거야 분명. 멀미가 날 것 같아서 잠깐 밖에서 담배를 한 대 피고 왔어. 너에게 도넛 모양 만드는 거 보여 주면 되게 신기해 했었는데, 이제 너도 방법을 알까. 

     

    너와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간직해 달라는 말을 이루지 못하고 다 태워버렸어. 정신을 차려 보니 다 타고 있어서 손을 집어넣었다가 나까지 태울 뻔했지 뭐야. 순간 내 손끝에서 불이 옮겨 붙어서 그 불이 온몸으로 번진 다음 불나방에 둘러 싸여 춤을 추는 상상을 했어. 그런데 다음 순간 내 손이 겁이 났는지 이미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말리고 있었어.

     

    요새 일이 잘 손에 잡히지 않아. 새 일을 시작해보고는 있는데, 생각보다 흥미 없는 일에 당첨된 모양이야. 인쇄된 종이에 있는 내용을 다시 디지털로 옮기는 일인데, 이럴거면 도대체 왜 처음부터 나무를 베어버린건지 의문이야. 사실 볼멘소리인 거, 네가 제일 잘 알겠지. EMP가 터진 후에 생각보다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일부 기록이 손상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지. 이렇게 착실하게 나무를 베어서, 내가 있는 이 마을만한 공간을 만들어 낸 걸 보면 얼마나 수뇌가 걱정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겠지? 결국 고생하는 건 나같은 말단 뿐이지.

     

    어이 O. 네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빌어먹을 사태 이후에 너에게 연락할 수단이 영영 사라졌어. 한 번 망가진 전자기기는 수리할 기술자와 부품이 없으면 고칠 수가 없는데, 그조차도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거든. 네 연락처, 너와의 sns 기록, 그밖에 모든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어. 생각해 보면 너도 마찬가지이려나. 잘 모르겠다 이건. 돈 있는 놈들이었으면 큰 문제 없었을텐데. 그 방호 설비? 이런 거 보편화된 지도 꽤 됐었으니까... 괜한 넋두리 잠깐 해봤어.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너에게 하고 싶었어. 5년이나 지난 옛날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참 바보라고 할 수 있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마지막에 싸우고 돌아섰던 일을 잊지 못하고 있거든. 내가 잘 지내고 있다, 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별 영양가 없는 말이라도 너에게 닿게 하고 싶었어.

     

    너에게 했던 철부지같은 말들 전부 후회된다. 멋지게 걱정하지 말라고, 신경쓰지 말라고 말 하는 게 최선이었을텐데, 어디론가 떠나버린다는 너의 말을 듣고 속절없이 헛소리만 지껄였지. 너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좋은 말들만 내뱉는데, 그게 되게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바보같은 휴대폰 회사들이 내장형 배터리만 잔뜩 만들어서, 휴대폰이 아예 고철덩어리가 되었을 때의 내 마음을 기억하는데, 진짜 미쳐버릴 뻔 했어. 돌아버릴 뻔했다고. 요새는 중학생들도 내장형 배터리가 있었는 줄 모르는 경우가 있는 거 알아? 도대체가 기술이 발전한다는 말은 허울 좋은 과실같은 게 분명해.

     

    솔직히 알아. 만일 그 빌어먹을 EMP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내 연락 중 어느 하나도 너에게 닿지 못했겠지. 요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이 바뀌는 그런 시대인데, 5년이라는 시간은 중학생을 대학생으로도 만들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 하물며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성인이 되어버릴 만한 시간인데, 사람 하나쯤 잊어버리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자주 이사를 다니지는 않는다는 믿음으로 보내는 우편이야. 사람이라는 존재는, 초목이 푸르른 동산보다 삭막한 부동산에 묶이는 경향이 더 크거든. 그러니까, 너가 이동을 하였더라도 크게 집을 옮기지 않았다면 좋겠다. 참 이상한 바람이야. 그렇지?

     

    이대로 가면 헛소리만 잔뜩 하다 마무리될 것 같으니까, 진짜 마무리할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애초에 생각은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이 빌어먹을 타이핑을 마치고 나면, 그리고 비밀 서약서에 정자로 사인을 하고 터덜터덜 마을을 나서게 되면, 한 번쯤 나와 점심이나 먹자. 반반씩 돈 내고 각자 먹는 그런, 점심.

     

    끝으로 혹시 당신이 O가 아니라면, 우선 O에 대해 아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흔치 않은 성이라 아마 기억하시리라 믿어요. 얼마 전에 입주하셨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요. 그 사람을 안다면 꼭, 다시 고이 접은 이 편지를 버린 다음, 백지를 편지봉투에 넣어서 전달해 주세요. 어이 없는 부탁이라구요? 전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정말 수없는 고민과 용기를 거쳤답니다. 그러니까,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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