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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책, 코 앞으로
    이야기 공방/소설 2021. 6. 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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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순수한 창작물입니다.

     

    옷장을 열었다. 동그랗게 말린 반팔 반바지들, 아직 갈 길을 정하지 못한 가을 셔츠들, 위쪽 어딘가에서 곰팡이와 인사할까 몸을 떨어대는 패딩들까지. 5월 첫째 주의 흔한 옷장 풍경이었다. 옷장을 열어보는 건 1년 만이었고, 그건 작년 5월 첫째 주의 공기를 옷장이 머금고 있음을 뜻했다.

    목은 성이 목 씨라서 별명이 나무였다. 곧추선 키와 흐느적거리는 팔이 버드나무를 연상시켜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목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은 다음부터 자신의 별명이 싫어졌다. 팔다리가 전부 잘려나가 그루터기만 남아서도 히히대며 웃어야 할 것 같았다. 하염없이.

    코로나 19로 목은 직장을 잃었다. 창문 너머 숲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자신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다 조금씩 잘려나갔고, 목의 통장잔고도 동일한 속도로 잘려 나가고 있었다. 프리랜서 아닌 프리랜서로 해피캠퍼스에 예전에 자신이 작성했던 보고서를 수정해서 올렸다. 스타트업에서 마케팅 시장의 동향을 살펴보며 분석적인 글쓰기에 자신감이 붙었지만, 지나치게 딱딱한 보고서는 마치 나무껍질처럼 부서져 내렸다. 목은 직장이 필요했다.

    이 날은 목이 25번째 이력서를 거절당한 날이었다. 5월 5일이기도 했다. 5x5 = 25라는 구구단을 떠올리며 목은 쓰게 웃었다. 돌돌 말린 반팔은 주름이 가득 져 있었고, 굳이 다림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치 땅바닥에 말린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목은 충동적으로 옷장 문을 열어둔 채로 방 한구석에 드러누웠다. 새하얀 천장에는 달을 닮은 조명이 밝았다. 창밖에는 태양이 쏘아낸 초고열이 고열이 되었다 결국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까지 희석되어 내리쬐고 있었다.

    목은 산책을 나갈 것이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바라보며 목은 한숨 쉬었다. 동시에 안도했다. 면도는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목의 턱과 인중 부근은 마치 나무뿌리같은 수염으로 가득했다. 털이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굳이 목과 코와 턱에 칼날을 들이밀어야 하는 걸까. 목은 알 수 없게 된 그 순간부터 면도기를 내다 버렸다. 로빈슨 크루소가 막 구조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가뜩이나 훤칠한 키에 체격도 다부진 목에게 수염이 붙으면 체감 나이는 10살은 족히 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걸 목에게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밖은 해가 계속해서 내리쬐고 있었다. 비를 부르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먹구름은 렌즈를 껴봐도 보이지 않았다. 목은 만 원짜리 수능 시계를 차고 검은색 반팔을 입었다. 반팔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목과 닮아도 보였다. 털이 수북하게 난 다리를 굳이 보이고 싶지는 않아 회색 긴바지를 입었다. 혹시 몰라 청자켓도 손에 걸쳐 들었다. 특별한 일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방은 매지 않았다.

    문득 생각난 듯 목은 새끼줄처럼 꼬아진 이불을 탁탁 털어 폈다. 먼지가 날렸다. 1년 묵은 옷장의 먼지가 가세해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목은 페브리즈 맨을 들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그리고 허공에 뿌렸다. 쏟아지는 입자의 폭포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귀를 접지 않아서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관에는 신발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목이 굳이 꺼내두지 않았다. 캐릭터 양말만 신은 채 신발장을 열고 흰색 스니커즈를 신었다. 뒤쪽이 꾸깃하게 접혀 흉물스러웠다. 현관문을 여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는데 신발장과 현관 사이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2주 간 아무 짓도 안 하고 잠자코 앉아만 있어도 인간은 적어도 20L의 쓰레기는 배출해낼 수 있다.

    홍콩 느와르 물에나 나올법한 복도를 목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이웃들 중 남에게 피해를 끼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타인은 지옥은 아니고 연옥 정도였다. 일단 되는대로 쓰레기봉투를 3개 정도 집어 든 목은 조심조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희석된 초고열의 햇빛은 다 식어버릴 때까지도 이 복도에 다다르지 못했다. 문에 붙은 중국집 메뉴판만 묘한 광채를 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올 때까지 사람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밤에 일하고 낮에 잔다. 한국에 살지만 유럽의 시간에서 사는 그들은 유럽과 어디도 비슷하지 않은 이곳 평화빌라에서 살고 있었다. 목도 그중 하나일 따름이었고, 목은 사정이 더 심했던 게 이 평화 빌라에서도 곧 쫓겨날지 몰랐다.

    잡생각을 털어버리며 목은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으로 걸어갔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는데 있었더라도 마스크를 견디지 못해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검은 마스크가 답답해 벗고 싶었다. 벗으려는데 정자에 어르신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차마 마스크를 벗지는 못했다.

    목은 그리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26번째 이력서를 쓰러, 그 지루한 마라톤을 끝낼 준비를 하기 위해 다시 돌아가야 했다. 10분간 목은 공원 벤치에서 기지개를 쭉 켜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고 켁켁거렸고 터덜터덜 다시 평화 빌라로 돌아갔다. 다음 산책은 26번째 이력서가 붙거나 떨어지거나 목이 정말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을 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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