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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끼가 말했다.
    이야기 공방/소설 2021. 5. 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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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순수한 창작물입니다.

     

    눈을 떴다. 먹을 수 없는 냄새가 가득했지만 따뜻한 굴에는 나와 비슷한 꼬물거리는 것들과, 그보다 월등히 큰 존재 둘이 있었다. 그들이 형제와 부모였다는 것은 개념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수많은 형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눈을 뜨게 된 지 몇 주 안 되어 보금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보단 매주 새 형제들이 생겼기 때문에, 정확히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어찌 되었든 직전까지는 굴이었을, 후두둑 떨어지는 흙더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위태로운 가로줄과 세로줄만이 작은 몸체를 지탱할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촘촘해서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발바닥에 걸리는 느낌은 전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공간은 너무 좁았다. 높이야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아 괜찮았지만. 코앞에 처음 보는 짹짹거리는 찍찍거리는 것들이 위아래로 옆으로 있었는데, 대화는 할 수 없었다. 이 허술한 굴들 중에는 나와 같은 종류의 꼬물거리는 것도 있었는데, 역시 너무 멀어 대화할 수가 없었다.

     

    맛있는 우유를 먹어야 하는 시간이 남았었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다른 형제들이 모두 나처럼 앞뒤로 막힌 굴 같은 곳에 들어 있다는 것도 안다. 처음 보는 것을 먹었다 배탈이 났다. 가로줄과 세로줄 사이로 배설했다. 이틀 뒤에 악취는 사라졌다. 이틀 뒤에.

     

    "엄마, 나 이거 사 주세요."

     

    "얼만가 볼까? 삼만 원이네. 저 조그만 게 참 비싸기도 하다. 지훈이 다음에 올 때도 생각 안 바뀌면 사는 걸로 할까?"

     

    "안 돼요. 지금! 지금 데려가고 싶어요. 나 잘 기를 수 있단 말이에요."

     

    "안 돼.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다 물고기 죽었잖아."

     

    "이번에는 아니야. 나 학교에서 토끼가 어떤 동물인지 다 들었어요. "

     

    "그래? 그럼... 내일 다시 올까? 집에 가서 토끼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음... 오늘 아니면 이런 토끼는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는걸. 죽으면 어떡해요? 게다가 엄마가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면 결국 안 사준다는 거잖아."

     

    "만약에 그렇게 빨리 하늘로 갈 토끼라면... 그건 병에 걸린 토끼니까 우리가 데려가도 같이 얼마 못 있을 거야 지훈아. 그리고 우리 딸 저번에 받아쓰기 100점 맞았으니까, 오늘 가서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자신 있을 것 같으면 데리러 오자. 어때."

     

    "그럼... 내일 다시 오죠 뭐."

     

    "역시 우리 딸, 기특해! 들어가자."

     

    속으로는 잘은 몰라도 데려가 달라는 말, 좀 데려가 달라고 이 좁은 곳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오물거렸었다. 그 말을 하는 대신 말린 풀이라는 녀석을 오물거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날 밤 난 짧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시. 내 옆에 있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존재들은 이미 하루 간격으로 죽어가고 있다. 난 맛있는 우유나 좀 더 마시고, 바람을 맞으며 뒷다리로 땅을 박차고 움직이고 싶었을 뿐이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분명 그 바람의 향과 땅의 감촉이 그 개념의 실체일 것이었다. 

     

    "엄마, 어제 봤던 그 온몸이 하얀 토끼가 없어요."

     

    "누가 먼저 데려갔나 보다. 다른 친구 한 번 볼까?"

     

    "아니야, 그 토끼가 아니면 의미 없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죠. 집에 갈래요."

     

    "지훈이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엄마가 사줄게."

     

    "또 먹을 거로 입막음하려는 거죠. 이제 안 통해요."

     

    "입막음이라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 왔대. 아무튼 엄마가 미안해. 다음에 또 괜찮은 토끼가 있으면, 꼭 사자."

     

    "아무튼 전 그 토끼가 아니면 안 사도 될 것 같았어요.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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