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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아메리칸」: 유럽의 텃세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8. 9. 10:30728x90반응형
# 이 글에서는 시범적으로 감상 포인트 몇 가지를 볼드체로 보여 드리고, 그 아래 생각을 정리하는 보다 체계적인 방식을 적용해 봅니다. 혹시 이전 글에 비해 더 나은 점이나 모자란 점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반영하겠습니다.
총평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충돌,
두 척도의 대립
헨리 제임스, 「아메리칸」, 민음사, 2005
# 더딘 서사 진행(?)
분량이 상당히 길어 애를 먹은 작품이다. 중반까지 이야기 진행이 더디다고 여겨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은 점이 큰 탓이다. 그러나 그것은 후반부 이야기 흐름을 모르고 내린 경솔하고 이른 결정이었음을 다 읽고 나서 깨달았다.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사교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보니(간접 경험을 통해 몇 번 접했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풍경이다), 서사의 진행이 느리게 느껴졌던 것 같다.
물론, 분량 자체가 긴 작품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고 따라서 시간을 충분히 두고 읽어야 한다. 중반부까지는 진득하게 읽는 것을 추천하는데, 사교계물(?)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내용 흐름을 잊을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몇 사건 단위로 끊어 읽는 정도는 괜찮다. 장편 소설이라고 꼭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면, 읽기가 더 힘들어지니까.
# 척도의 차이, 척도의 다양화
작품은 뉴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느낀 건 필자,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가 뉴만의 그것과 좀 더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부를 축적하여 성공하는 미국식 이야기에 꽤나 익숙한 상태이며, 명예 또한 중요하지만 작품의 사교계에 팽배한 그런 수준의 명예 추구는 과거 조선시대 명문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싱트레 부인과 그 가족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생각을 조금 이어가자 조금 방향이 달라졌는데, 어찌 보면 명예를 중시하는 쪽이나 돈을 중시하는 쪽이나, 결국 어떤 척도의 우수함을 최고로 치느냐의 문제일 뿐이 아닐까. 뉴만 또한 주변인들의 평판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큰 틀에서는 싱트레 부인의 가족과 그 가치관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비중이 다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생각해 보면 현대 사회 또한 이런 저런 척도로 친하게 지낼 사람, 사랑할 사람을 고르게 된다. 그 척도가 돈이나 명예일 수도 있지만 관심사, 직업, 정신적인 측면일 수도 있겠다. 보다 많은 범위에서 보다 많은 선택지의 척도를 선택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면, 뉴만과 싱트레 부인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 나오미 양
서사 진행 그 자체를 제외하고 크게 세부적으로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없었는데, 단 하나 나오미 양의 묘사를 보고 조금 반대하고 싶어 졌다. 필자의 입장에서 나오미 양은 당당하며 자기 잇속을 잘 챙기는 사람이다. 작품에서는 시종일관 나오미 양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느낀다.
# 두 세계의 만남: 신선한 지점
작품을 읽으며 두 세계의 만남이라는 측면은 무척 신선했다. 유럽 문화에 전혀 위축되거나 구속되지 않는 외부인의 등장으로 서사가 힘 있게 진행될 수 있었다. 놀랍도록 완고한 유럽 사회의 숨겨진 보수성도 힘 있는 전개에 한몫했는데, '반전이 한 번 더 일어나지 않는' 반전이 돋보였다.
21세기 현재에는 생각보다 작품과 유사한 상황이 (크든 작든)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지만 필자 또한 일본 여행에서 현지인 친구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고, 영어로밖에 대화할 수 없었지만 서툰 영어 속에서 참 많은 정보와 감정을 주고받았다. 고작 이틀 간의 여행이었을 뿐인데, 사람 사는 게 틀리지 않으면서도 무척 다르다 생각했었다(자판기 사진까지 찍어 가는 필자를 보며 신기해하던 현지인 친구가 떠오른다).
요 근래는 사실 이런 충돌이 빈번하다보니 '지구촌'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존중하고 관용하려는 분위기가 농후하다. 적어도 그러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문화 상의 차이로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는 분들이 분명 있으리라. 이런 상황이 어떨 때는 딜레마처럼 느껴진다. 상대를 존중한다면 그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옳지만, 상대를 붙잡고 싶다면 그 문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게 옳다. 각자의 선택이 중요한데, 다시 말하지만, 그런 점에서 싱트레 부인의 결정이 필자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쉽게 느껴진다.'깜빡의 서재 >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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