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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길 외,「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8. 1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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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별 작품에 대한 감상은 '짧게 보는' 카테고리에 추가해 두었습니다. 이 글에는 좀 더 긴 감상들을 담았습니다.

     

     


    총평

    새로운 10년의 문단

    : 샐러드 볼


    강화길 외,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 New Decade (새로운 10년)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은 약간의 탈이 있었다. 발행 직후 불거졌던 '사적 대화 인용' 문제가 그것이었는데, 위 책은 해당 작품을 삭제하여 재발행된 것이다. 작가가 수상을 물리고 7개였던 수상작품이 6개로 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2020년대의 출발에 있어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도 느낀다.

     

    2020년의 문단은 한층 더 날카롭고, 그렇지만 따뜻하다. 다루는 스펙트럼도 매우 넓어졌는데, 김초엽 작가님 같은 경우 SF 영역에서 출발하여 젊은작가상을 수상하였다. 개인적으로 장르소설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김초엽 작가님의 수상에 힘입어, 특유의 작품성을 인정받은 더 많은 범주의 작품이 젊은작가상에 등장하였으면 좋겠다.


    # 작품별 감상

     

    강화길, 음복

    작품을 읽으며 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을 느낀 독자라면, 이 책을 절반 정도 잘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감정에 더해 분노와 공감과 속상함, 여타 답답한 마음까지 함께 느꼈다면, 당신은 이 책을 거의 잘 이해했으며 공감까지 마친 것이다.

     

    필자는 처음 읽었을 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보다 전문적인 설명을 듣고 난 뒤에는 심한 불편함을 느꼈다. 내가 사는 세계가 뒤집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읽었을 때에는 무조건 화를 내며 공감해 보았다. 죄책감만 마구 들었고 해결책에 대해서는 크게 떠오르지 않았다. 세 번째 읽으면서 어떤 내용에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어떤 내용에는 '와 저런 놈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보았다. 아직 감상이 부족한 느낌이다.

     

    혹시 이 작품을 아직 읽지 못한 분이라면, 살아온 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알아두길 바란다. 특히 가족 문제에서 벗어나 살아올 수 있었던 남성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마음을 느낄 것이다. 혹시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면, 이런 당부를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의 일이 아니리라 믿지만, 당신의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결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이미 비밀을 알아버렸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벗어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나아가라.

     

    끝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 이 소설의 일은 어딘가에서는 일어났을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쓰고 감상을 나누지 않는다면 말이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필자는 대립성이 짙은 의견, 그러니까 '뜨거운 감자'를 선호하지 않는다. 왠지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면 다수의 의견에 맞춰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눌리는 듯한 반감을 느낄 때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거나 기존의 주장을 하향 조정하게 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고, 쓸 수 있는 글이 많지 않다.

     

    작품을 읽으며 느낀 생각을 모두 말했을 때 나에게 돌아올 반감이나 시선이 겁날 때가 있다. 분명 내가 선택하고 생각해서 꺼낸 이야기일 텐데도,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보낼 시선이 겁나서 꺼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 용산 사건의 잔인함과 저항에 대해 말하는 발표자를 보며 대단하며 불편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정도로 강경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은 희원의 마음에 공감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이면 '없었다'라고 생각한다. 특히 본인의 안온한 세상을 흔드는 일일 때 그런 마음을 품기 쉽다. 그래서 그것을 실제로 겪은 사람의 이야기라도 '과장되었다'며 부정하곤 한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그건 그 일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곧 '내 안온한 세상은 모래성'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글을 처음 읽기 전까지 (조금씩 나아지곤 있었지만) '생리'라는 단어 자체를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무언가 감추고 숨겨야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작품 전면에 자세히 써 놓은 것을 보고 놀랐다. 막상 계속해서 되뇌고 보니 그저 인간의 생리 활동이다. 그동안 나는 어떤 교육, 어떤 모습을 보아왔길래 이런 생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걸까. 궁금했다.

     

    작품 말미, 강사님이 했던 말은 일종의 소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희원을 어린이로 보는 시선도, 단념시키려는 시선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세상이 많이 바뀌어야 이루어지는, 그런 소망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이 아니라 각 개인이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세상 전체가 바뀔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품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이건 고전을 읽으면서 자주 느낀다).

     

    나는 이 글을 구태여 특정 프레임에 가두고 싶지 않다. 이 글이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나 생각의 틀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흔히 판타지 세계에서 다루는 이야기처럼, 인간 세상 바깥에 있는 악마 소굴로 이런 새로운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시선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싶다.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원래 배워왔거나 들어왔던 것과 관계없이 이야기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이런 유려하고 품위 있는(?) 작품을 볼 때마다, 스스로의 글 쓰기에 큰 벽을 느끼게 되고, 더 노력해야겠다고 느낀다.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야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여러 근거와 말들과 정보들이다. 이 글은 그런 점에서 100점을 줄 만하다(너무 흔한 비유일까?).

     

    낙태 문제란 필자에게 윤리 시간에 다루었던 교과서 스크립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수컷 해마도 아닌 존재가 낙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을 텐데, 꼭 내 일이 아니더라도 내 주위 어딘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관심 가져야 하는 문제임을 지금은 안다.

     

    지수가 해수를 바라보며 느끼는 고뇌는, 낙태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지수가 '당신'에게 품는 서늘하고도 몽글한 마음만큼은, 절대로 사라질 수가 없다. 이 지점에서 현실에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다. 온전히 개인의 선택, 어떤 선택을 하든 비난받지 않을 선택, 너무 기울어지지 않은 장단점을 보며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어야 선택일 수  있다.

     

    글을 읽고 난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느낀다. 스스로가 관련된 문제에 처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떤 말을 할지 전혀 모르겠다. 다만 임신중절술이 고통스럽지 않고,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강하게 동의한다. 그런 사실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생명의 개념을 어디까지 두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잉태된 지 얼마 안 될수록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 어렵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이런 문제를 눈 앞에 두고 나면, 혼자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하나 둘 정도는 있어야 옳다.

     

    김초엽, 인지 공간

    기억이라는 주제는 게임의 인벤토리를 연상시킨다.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억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는 몇 단계의 거름망을 통해 계속 들고 갈 기억을 결정한다. 마치 인벤이 꽉 차서 아이템을 다 들고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집단이라는 창고가 있더라도 결국 보관할 수 있는 정보는 무한하지 않다.

     

    비단 격자라는 물리적인 공간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기억은 잊히고 또 사라진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생각과 전제만 하게 된다면, 그 세계는 분명 폐쇄적으로 변할 것이다. 어쩌면 한 두 사람의 결정으로 인류에게 중요한 정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집단 클라우드가 거대한 단일 지성보다 긍정적이라는 생각을, 작품을 읽으며 더 강하게 할 수 있었다. 결국 이브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소리다. 각 개인이 수합한, 개개별로 우선도가 다른 정보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 생각해 보면 현재 인터넷 세계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앞으로의 지식 공유는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한 것에 전문성을 더한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 가지 더, 작품을 읽으며 신체적인 다름이 가져오는 불공평함이 얼마나 뼈 아픈지 알 수 있었다. 격자를 돌아다닐 수 있는 비행 도구를 마련한다거나, 최소한 격자의 내용을 지상 0m에서 꺼낼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어야 한다. 

     

    이브의 탄생은 격자 공간을 지닌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이다. 이브의 육체적 한계는 이브를 제외한 모두의 정신적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니 격자 공간에 발을 딛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인지 공간이 무한하며 영원하고, 자신들이 행하고 믿는 것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내려두어야 할 것이다.

     

    인지 공간은 세 번 정도 읽었음에도 그 아이디어가 질리지 않아서 좋다. 현실 속에 대입할 수 있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특히 사건에 개연성을 부여하면서도 특유의 메시지를 살려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럽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장류진, 연수

    필자는 운전연수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록 다시 잡아 본 운전대가 너무 어색하고 이상하고 머리 아파서 보류하긴 했지만. 작품 속 주연처럼 차를 모는 것이 겁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몰아보기 전까지는.

     

    2년 만에 꺼내 든 장롱 면허와 함께 짧게 차를 몰면서, 그 짧은 순간에도 경적을 울리고 차창 밖의 나를 스윽 확인하고 사라진 차가 있었다. 솔직히 겁이 났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바쁘고, 더 친절하지 않다. 초보운전이라는 것을 정말 힘내서 알리지 않으면, 그 시선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는다. 

     

    작품은 연수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작품은 주연의 첫 번째 실패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실패의 예고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주연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한 실패라고만 볼 수는 없고, 그보다 커다란 장벽이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딱히 걱정스럽거나 하지는 않는데, 주연은 실패 한 두 번 하더라도 굴하지 않을 뿐더러 결국엔 성공할 인물로 보인다. 연수를 성공적으로(?) 마쳐가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주연이 앞으로 가는 길에, 조금은 이상해도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강사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주연 스스로가 강사가 되기는 어려워 보이니 말이다.

     

    작품 속 인물이 좀 더 농도 짙게 현실적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렇지만 그냥 있을 법한 일이 맞아서 더 주의 깊게 읽게 된다. 필자도 직장을 구하고 나면 운전연수를 받아봐야겠다.

     

    장희원, 우리(畜舍)의 환대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찾아본 제목의 괄호에는 '축사'라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조금 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통 우리 주변에 설정된 세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가정일 수도 있고, 교육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안정감을 향한 집착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그런 우리는 알게 모르게 표리부동하다. 어, 그러니까, 겉으로만 웃을 때가 있다.

     

    '재현과 아내', 즉 영재의 부모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에서 벗어났다. 그렇기에 그들이 보는 풍경이 그들에게 이상하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간이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게 뒤집히다니. 그럼 우리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해서 은근히 권유하고 강요하던 것들은? 그건 그저 우리의 우리(畜舍)였을까?

     

    우리는 종종 개인주의적일 때가 있는데, 그 개인주의가 집단 단위로 뭉치게 되면 무섭다. 내가 사는 세상이 소중한 만큼, 내 주위의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도 소중하다. 이 말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때때로 불편한 것들이 있지만 웃어넘기며 스스로를 관대하다고 생각하는, 필자와 같은 사람이 읽어 보기에 좋다. 그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읽으면서 묘하게 눈살이 찌푸려지면, 이제 깨달음을 얻을 준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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