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스크에 낀 인형이야기 공방/에세이(?) 2021. 5. 2. 17:31728x90
26일 가족 여행으로 청송에 들렀다. 사과나무가 무성한 동네였다. 지지대에 지탱한 나무를 보고 덩굴로 착각할 정도로 사과나무가 빽빽하고 많았다. 사과의 고장 청송에 하루 정도 있었고 하루 있었던 것 치고는 꽤나 많은 것을 보았다. 수풀로 들어가던 뱀, 창고같이 생긴 사과 직판장, 영화에 나왔다는 주산지 등 정말 많은 풍경들이 생각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이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마스크를 낀 인형이었다. 아니, 귀 상태를 보면 마스크에 끼인 게 맞지 않나 싶은 상태의 인형이었다.
숙소 지하에 있는 마트에 가다 앞쪽 포토존 같은 곳에 진열되어 있던 인형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인형에도 마스크를 씌웠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침울해 보이는 인형을 보곤 부모님께 저 인형 좀 보라며 웃었다. 그렇지만 좀 더 오래 보니 인형이 불쌍했다.
다른 인형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저 강아지(?) 인형만 사진을 찍어온 건 특유의 눈 때문이었다. 보았을 당시 눈에 우울과 체념의 빛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떤 구도에서 보면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사진을 보며 마스크가 없다고 상상해 보면 오히려 기개 있고 자신감 넘치는, 그러니까 들판에 발을 들이면 단숨에 1km는 뛰어야 직성이 풀릴 눈빛이다. 마스크의 유무로 이렇게까지 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마스크를 쓰면 그 성능이 좋으면 좋을수록 먼지와 함께 공기까지 필터링되는 느낌이다. 숨을 쉬고 싶은데 잘 쉬어지지 않는 그 느낌은 절대 익숙해지지는 않고 그냥 오래됐다. 그렇다고 범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잠깐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큰 무례가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나가고 싶기는 해서, 항상 조심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쪽으로 타협하고 있다.
이런 시간들이 너무 길어진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하게 되었다.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시간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마스크를 낀 인형의 사진을 보면 난 그 눈빛에서 더 강한 체념과 분노의 빛을 찾아낼 것이다. 몇몇 마스크를 끼지 않고도 산책을 다닐 수 있는 미지의 세계들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마스크가 있기 때문에 인형의 눈빛이 한층 더 우울감에 잠겨 보인다. 생각보다 내가 마스크를 쓰는 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런 말이다. 그래서 인형이 눈에 밟혔다. 인형도 나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말해보고 싶다.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열어보았을 때, 마스크를 낀 인형을 보며 웃기다고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야기 공방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이, 하나뿐인 큰 그림 (부제: 어떤 인생을 살까 고민해봤습니다.) (0) 2021.06.23 넷플릭스 「Dr.STONE(닥터 스톤)」을 보고 (0) 2021.06.12 달리는 남자를 봤었습니다. (0) 2021.06.03 정신 없는 하루: 일사병(?) (0) 2021.04.22 교정 후에는 주름이 남을 수 있습니다. (0) 202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