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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코 빠지는(?) 이야기들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6. 14. 22:23728x90반응형
총평
황당하지만
그만큼 통찰력 있는
이야기 모음.
고골,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민음사, 2005
러시아의 문학은 기본적으로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아직 많이 접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지점이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환상적이라기보다 당황스럽기까지 한 이야기들이 어디로 튀는지 지켜보고 있으면 시간이 말 그대로 순삭(!)된다.
코
정성 들여 쓴 미친 소리와도 같은 작품이다. 아마 작가도 이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지 않을까. 코에 대해 여러 가설을 세워 보았다. 첫째로 코는 주인공 꼬발료프의 내면의 욕망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욕망을 대신하여 충실히 실현해 주는 매개체이다. 그게 아니라면, 코는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육체의 결함이 가져오는 자신감의 상실과 육체의 회복이 가져오는 자신감의 회복과 관련된 가설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이 작품을 읽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뇌를 살짝 바닥에 내려 둔다. 그리고 책을 펼친다.
외투
외투라고 하면 요새는 무신사에 들어가서 할인하는 제품을 사도 되고, 아웃렛에서 마음에 드는 제품을 구매할 수도 있고... 아무튼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나 명품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너무 이야기가 짠내 난다. 러시아 문학에 워낙 급작스러운 결말이 많고 그것을 매력으로 생각하고는 있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는 조금 찜찜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겨울이 더 춥게 느껴질 것만 같은 기분.
광인 일기
이 작품에도 '코'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작가가 그냥 코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러시아의 관등제가 마치 계급제처럼 느껴지는 지점들도 더러 있었고, 특히 주인공이 너무 비굴하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여러 장벽을 세워 우리를 자학하곤 하는데, 이 작품을 읽고 더는 그러지 않아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참, 원어로 읽으면 좀 더 기괴한 느낌이 들 것 같은 기대가 있는데, 러시아어 스터디를 하지 못해서 아쉽다.
초상화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서 꽤나 짜임새도 있고, 사건의 흐름이 다채로웠다. 읽으면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그 안에 영혼이 빨려들어갔다고 믿은 일화도 문득 떠올랐다. 재화로도 구매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이었다(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현재, 그리고 높은 확률로 미래에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그런 극한의 재화 만능주의(?)가 악마성과 닮아 있는 것도, 그 그림을 소유한 자 또한 이에 영향을 받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결국 초상화는 잘 불태워졌을까? 아니면 지금도 유럽 골동품 상점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까? 제발 사라졌기를.
네프스키 거리
옛 러시아의 남자들은 스토킹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행하였구나, 싶으면서도 별로 정당화해주고 싶지는 않다. 좀 더 배려심 있게 살아가는 법을 그 당시의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테니.
한 남자는 자신의 이상에 여인을 맞추어 망상에 빠진다. 보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커지면, 상대 그 자체보다 상대방의 허상을 좇게 됨을 작품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절망에 빠진 남자의 최후가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다. 다른 남자는 남편이 있는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저돌맹진(?)을 시전한다.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느껴졌다.
위 글은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를 읽고 필자의 감상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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