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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교육의 반성
    깜빡의 서재/책을 읽고 2021. 9. 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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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체험이 물씬 담긴 작품입니다. 작품과 헤세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글에서는 최대한 작품 내의 정보만을 바탕으로 작품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총평

    생각보다 어두운 시선

    그것들이 던져주는

    나아져야겠다는 다짐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2001

     

     

     

     

     

     

     

     

    # 이런 분께 추천, 안 추천

    혹시 희망찬 결말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책은 추천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시선을 좋아하지 않는 분에게도 추천하지 않는다. 강한 강도의 정신 노동이나 육체 노동을 해 본 분들이라면 작품을 읽고 분명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사회를 비판해 보는 작품들을 찾아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강력 추천한다. 주입식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이라면 읽으면서 박수를 칠 만한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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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꼭두각시 영재

     

    작품 속 한스 기벤라트는 꼭두각시다. 재능을 인정 받아 상급 교육과정을 밟을 기회를 얻었지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실제 본인이 원하는 것보다 더 고통받아야 했다. 한스 본인이 기껏 선택한 교우관계는 교사나 교장, 심지어 아버지에게까지 무시당했다. 꼭두각시가 줄이 끊어지면 행동을 멈추는 것처럼, 한스 또한 주위의 어른들에게 무시당하며 점점 나락으로 빠져갔다.

     

    한스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재'다. 흔치 않은 능력에 따르는 기대와 시선은 한스를 끊임없이 학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나쁘다고만 바라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그것이 미래의 한스에게 독이 될 정도로 과도했다는 점이다.

     

    내심 한스가 성장하고 더 강한 인물이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결말부를 보며 무척 아쉬웠다.

     

    # 헤르만은 방해였을까?

    한스 기벤라트는 신학교에서 자신과 정반대 성향을 가진 친구 헤르만 하일너를 만난다. 생각해보면 한스가 주위 어른들에게 공격당하고, 학업에서 멀어지고, 결국 불행한 결말을 겪게 된 계기는 이 헤르만 하일너와의 교제이다. 사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헤르만은 한스에게 있어 일종의 방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과연 그럴까?

     

    개인적으로 한스는 헤르만이 없었더라도 결국 헤르만처럼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헤르만이 있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군가와는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한스가 헤르만과 교제하기로 한 것은 다름아닌 그 스스로의 의지다. 한스는 헤르만과의 만남이 그 스스로의 학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헤르만이라는 인물에게 끌려서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헤르만이 방해라든가, 한스가 헤르만에게 잘못 물들었다는 식의 생각은 곤란하다.

     

    특히 어린 시절 감상적인 면을 제대로 계발하지 못한 한스에게 하일너의 존재는 오히려 도움이었을 수 있다. 만일 한스가 아무런 변화 없이 계속해서 학업에 정진했다면 좋은 결과를 얻었겠지만, 이에 비례하게 그 마음은 심하게 망가졌을 것이다. 빈번하게 번아웃이 와 어느 순간에는 멈춰서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일너와의 만남은 한스에게 있어 전환점이었다. 그 전환점이 주변 환경의 한계로 인해 긍정적으로 흘러가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아쉽다.

     

    # 작품 속 교사 집단

    필자는 교육 관련 전공자로, 전공을 살려 선생님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작품 속 교사 집단은 너무 별로였다. 이것은 작가 헤르만 헤세의 입김이 다분히 작용한 것이겠지만, 그 비판은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주입식 교육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교사라면 응당 학생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우선적으로 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작품 속 교사 집단은 그런 면에서 교사 자격 미달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냉혹하다.

     

    작품 속 교사들에게 학생은 자신들의 의도를 충족시킬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식은 학업 그 자체뿐 아니라 학생들의 교우관계나 생활에까지 반영된다. 교장이 한스와 헤르만을 떨어뜨리고자 했던 지점에 이러한 간섭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은근하게 학생들을 낮춰 보며 그들을 훈계할 생각에만 사로잡힌 교사 집단을 보며, 이렇게는 되지 않아야겠다 다짐했다.

     

    # 우리의 교육

    잠시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움직여 보려 한다. 여러분이 학창시절 경험했던 교육은, 과연 이 작품과 얼마나 달랐는가? 영화 '세 얼간이'와 같이 학업 스트레스로 고통받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영재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종종 들어본 적이 있다. 꼭 영재가 아니더라도, 수능 공부를 하다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뉴스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물론 우리의 교육은 「수레바퀴 아래서」의 교육과는 시간차가 있다. 분명 더 발전한 점이 있다. 그러나 아직,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고민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들이 있다. 주위 어른들의 말을 듣고 학업에 정진하고 좋은 대학에 가려 하지만, 정작 미래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실은 공부를 포함해서)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하지 못한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는 동기를 얻지 못하면 어느 순간 지치게 된다. 인생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다지만, 평생 하나의 길만 보고 온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다른 길로 갈아타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러니 교육은 여러 갈래의 길을 알려주고 난 뒤 하나의 길에 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교육과정 개발 차원에서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선택지를 늘려주고 선택의 고민을 줄여줄 만한 기술(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피드백 등)도 개발되고 있으니... 부디 이러한 노력들이 이상(理想)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 공부와 고통

    작품을 보며 안타까웠던 건, 단순히 결말이 부정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한스가 기계공 생활을 하며 겪게 된 일은, 한스가 살아가기만 했다면 분명 값진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작품을 보며 정말 안타까웠던 건 한스가 점점 공부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한스는 재능과 노력을 인정 받았다. 페이스 조절만 잘 했다면, 한스는 분명 좀 더 큰 꿈을 품고 깊게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은 전혀 짧지 않은데, 한스는 너무 지나치게 달렸다. 때로 달리며 둘러보아야 할 풍경도 하나 둘씩 잃고 말았다. 그래서 한스는 공부를 하다, 왜 공부를 하고 싶은지마저 잊고 말았다.

     

    공부와 행복의 반비례함을 생각하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다. 그런데 왜 어린 시절의 행복함을 모두 버리고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할까?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니, 그 안에서 나름의 보람이나 의미를 찾고 여가 시간을 알차게 보내면 되지 않을까?

     

    공부를 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공부 자체가 고통스러운 현실은 여러모로 아쉽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즐거운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배운다는 것이 곧 즐거운 것을 빼앗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적절히 쉬고, 적절히 배워야 한다.

     

    물론 영재를 세기의 위인으로 키우고 싶은 주변 사람들의 열망도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지만... 그것이 학생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위한 것인지 한 번쯤 더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한스에게, 플라이크 씨와 같은 사람이 두 사람 정도만 더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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