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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깜빡의 서재/짧게 보는 2021. 9. 16. 19:44
# 2021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된 작품들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최대한 전달력 있는 감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필자는 블로그를 통해 배려니 화해니 용기니 하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열심히 써왔다. 지면이 아닌 실제 세계에 그 단어들을 가져오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고민과 행동을 해야 할지, 작품을 읽으며 계속 곱씹어봤다.
'나'는 작품 속 서사에서 멀어져 있다 생각하면서도 자꾸 그곳에 끌려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실은 '나' 또한 하나인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다고 느끼지만 자꾸 끌려 들어간다.
'나'는 고민하면서도 세계의 논리에 어긋나게 행동할 수 없다. 애매모호한 자세로 기존 세계에 편승하는 '나'의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데, 막상 스스로가 '나'와 얼마나 다를까 눈에 그려보면, 그저 부끄럽다.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틀어 볼까 한다. 교수자와 학생의 어중간한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는 때로는 공과 사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어중간함이 '나'를 공격한다고, '나'는 믿는 듯하다. 그러나 그 어중간함은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처럼 만연한, 흔한 특징에 불과하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그래서 밴다이어그램을 옮겨 타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교수의 세계와 학생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 안에는 확고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몸은 이런저런 원들을 옮겨 타더라도 의식만큼은 교집합 한가운데 자리 잡아야 한다. 충돌하는 것들을 모두 살펴본 후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원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학생의 입장에서 필자는 '나'가 변명한다 느낀다. 교수자들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며, 더더군다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만 교수자의 입장에서 필자는 '나'에게 연민을 느낀다. 교수자들을 보며 안타까우며, 학생들에게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앞으로 살아가며 이런 양가적인 감정들을 많이 느끼게 되리라 직감한다.
그러니 '나'가 명조에게 공격당했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참 좋겠다. 말 하나하나에 무작정 자책하는 것도 피하게 하고 싶다. 다만 '나'가 그런 지점들을 무심결에 넘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꼭 멈추지 말라 응원하고 싶다.
필자 또한 누군가의 눈에는 아니꼽고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귀찮거나 못됐거나 부담스러운 사람일 테다. 과거에는 한 명이라도 스스로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심장이 아파왔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도 함께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세계의 일부이며, 무수한 교집합에 둘러싸여 있으며, 교집합의 내부는 소용돌이처럼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것을. 앞으로 필자가 어떤 편에 속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 목표가 있다면, 어디에 있든, 맨 처음 언급했던 단어들을 자신 있게 내뱉고 싶다. 그렇다면 어딘가 나를 손가락질하는 존재들이 있더라도 괜찮다.
한국현대소설학회 역, <<2021 올해의 문제소설>>, 임현,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 푸른사상, 2021
반응형'나'의 모습을 보며 방황하는 스스로를 느꼈는지 말이 길어졌습니다. 저도 요새 남들이 웃고 넘기는 것들을 보면서 혼자 심각해질 때가 있어요. 얼마나 더 그래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전 부표처럼 쓸려 다니는 중이거든요...ㅎㅎ(대충 가치관과 주관을 명확히 잡지 못했다는 뜻)
글 읽으시는 분들도 혹시라도 새로운 환경에서 급작스럽게 혼란을 겪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왕이면 주변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적응하시기를 바라고, 그보다 더! 자아를 확고히 하시길 바랍니다. 자아가 확고하다면, 소용돌이 속에서도 형체를 잃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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